카를 프리드리히 괴르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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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프리드리히 괴르델러는 독일의 정치인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라이프치히 시장을 역임했으며, 나치 정권에 저항한 인물이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독일 국가 인민당에서 활동하며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했다. 대공황 시기에는 물가 담당 제국 위원으로 임명되어 디플레이션 정책을 추진했다. 나치 정권 하에서 경제 정책에 반대하며 저항 운동에 참여,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연루로 체포되어 1945년 처형되었다. 그의 반나치 활동은 높이 평가받지만, 반유대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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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프리드리히 괴르델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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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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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 | 라이프치히 시장 |
임기 시작 | 1930년 5월 22일 |
임기 종료 | 1937년 3월 31일 |
이전 시장 | 카를 빌헬름 아우구스트 로테 |
다음 시장 | 루돌프 하케 |
출생일 | 1884년 7월 31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포젠 현 슈나이데뮐 (현재 폴란드, 비엘코폴스카 주, 피와) |
사망일 | 1945년 2월 2일 (60세) |
사망지 | 나치 독일 베를린, 플뢰첸제 교도소 |
사망 원인 | 교수형 |
정당 | 독일 국가인민당 |
배우자 | 아넬리제 울리히 |
자녀 | 5명 (라인하르트 겔델러 포함) |
직업 | 정치인 공무원 기업 임원 경제학자 |
국적 | 독일 |
기타 이름 | 겔델러 |
알려진 이유 | 나치 독일의 보수적인 저항 운동 지도자 중 한 명 |
서명 |
2. 생애
프로이센 왕국 포젠주의 슈나이더뮐(현 폴란드 피와)에서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튀빙겐 대학교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한 뒤, 1911년부터 프로이센 라인 주의 졸링겐 시 정부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2]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주로 동부 전선에서 복무했다.[2]
전후에는 초보수적인 독일 국가인민당(DNVP)에 입당하여 활동했으며, 1922년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부시장을 거쳐 1930년 라이프치히 시장으로 선출되어 1937년까지 재임했다.[2]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의회 민주주의에 비판적이었고, 독일이 1914년 이전 상태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보였다.
나치가 집권한 후, 1931년~1932년과 1934년~1935년 두 차례에 걸쳐 연방 가격통제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나치의 인종 정책과 독일 재무장을 위한 과도한 지출 등에 점차 반대하며 갈등을 겪었다. 특히 1936년 라이프치히의 유대인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 기념비가 나치에 의해 철거되자 이를 재건하려 시도하는 등 나치 정책에 정면으로 반발했고, 결국 1937년 나치의 압력으로 시장직에서 사임했다.[2]
시장직 사임 이후 괴르델러는 본격적으로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저항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로베르트 보쉬 유한회사의 직위를 이용하여 해외를 오가며 연합국 인사들과 접촉하고,[4] 전 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 등 군부 내 보수파 인사들과 협력하여 히틀러 정권 전복을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다. 그는 쿠데타 성공 시 자신이 총리가 되어 서방 연합국과 휴전하고 소련과의 전쟁을 지속하려 구상했다.
괴르델러는 7월 20일 음모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으나,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전부터 게슈타포의 추적을 받던 그는 잠적했으나, 1944년 8월 12일 폴란드에서 밀고로 체포되었다.[2] 그해 9월 9일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12] 1945년 2월 2일 베를린의 플뢰첸제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12]
2. 1. 초기 생애 및 경력
카를 프리드리히 괴르델러는 1884년 프로이센 왕국 포젠 주 슈나이더뮐(현재 폴란드 피와)에서 프로이센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1] 그의 가족은 문화적으로 풍요롭고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으며, 민족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다. 괴르델러의 아버지는 자유보수당을 지지했으며 프로이센 란트타크 의원으로 활동했다. 젊은 시절 괴르델러는 자신의 좌우명으로 ''omnia restaurare in Christo''(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회복시키라)를 선택했다.[1]1902년부터 1905년까지 튀빙겐 대학교에서 경제학과 법학을 공부했다.[2] 1911년부터 프로이센 라인란트 주의 졸링겐 시 정부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으며,[2] 같은 해 안넬리제 울리히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 그는 국가에 대한 강한 의무감을 지녔으며,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주로 동부 전선에서 복무하며 대위로 진급했다.[2] 1918년 2월부터는 민스크에서 독일 군정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2] 전쟁 후에는 단치히(현재 폴란드 그단스크)의 제17군단 본부에서 근무했다.[2]
전후 괴르델러는 극우 성향의 독일 국가인민당(DNVP)에 입당했다. 그는 베르사유 조약, 특히 독일에 영토 할양을 강요한 조항들에 강하게 반대했으며, 1919년에는 서프로이센의 독일 반환을 주장했다.[2] 또한 폴란드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며 제2 폴란드 공화국의 파괴가 독일 동부 국경 문제 해결의 유일한 길이라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당시 단치히 부두 노동자들의 파업 진압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는 볼셰비키 러시아보다는 폴란드를 덜 위협적인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1922년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현재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부시장(Bürgermeister|뷔르거마이스터de)으로 선출되었고,[2] 1930년 5월 22일에는 라이프치히 시장(Oberbürgermeister|오버뷔르거마이스터de)으로 선출되어 1937년까지 재임했다.[2]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그는 근면하고 유능한 시정 전문가로 평가받았다.
괴르델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의회 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독일이 1914년 이전 상태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0년대 초반에는 대공황을 겪으며 바이마르 체제가 실패했다고 보고, 민주주의를 대체할 보수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주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1931년 12월, 당시 총리였던 하인리히 브뤼닝과의 친분으로 물가 담당 제국위원으로 임명되어 디플레이션 정책 감독을 맡았고, 이를 통해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그러나 DNVP의 지도자 알프레드 후겐베르크가 브뤼닝 정부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괴르델러는 1931년 당에서 탈당했다.[3] 1932년 브뤼닝 정부가 붕괴하자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 등으로부터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그의 DNVP 경력을 문제 삼아 임명을 거부했다. 이후 프란츠 폰 파펜 내각 참여 제안도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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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집권 초기, 괴르델러는 아돌프 히틀러를 '계몽된 독재자'로 보고 적절한 조언을 통해 긍정적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훗날 이 시기를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그는 나치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NSDAP 가입을 거부했다. 1933년 4월 1일 전국적인 유대인 사업체 보이콧 당시, 라이프치히 시장으로서 돌격대(SA)에 보이콧 중단을 명령하고 경찰을 동원해 SA에게 인질로 잡힌 유대인들을 석방시키는 등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나치의 '아리아인화' 정책으로 위협받는 라이프치히의 유대인 사업가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문 공무원 복직법과 같이 뉘른베르크법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차별적인 초기 법률들을 시장으로서 시행하기도 했다. 1935년 4월, 라이프치히 부시장 루돌프 하케가 기존 법령을 무시하고 모든 유대인 의사의 공공 의료 보험 참여를 금지하자, 괴르델러는 이 조치를 중단시키고 기존 법에 따른 허용/제외 목록을 발표했다. 이는 기존 법의 테두리 안에서나마 일부 유대인 의사들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시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괴르델러는 히틀러에게 경제 정책에 관한 조언을 담은 메모를 보내는 등 정권에 영향을 미치려 했으나, 히틀러가 이를 무시하고 괴르델러가 무책임하다고 본 정책들을 추진하자 점차 환멸을 느꼈다. 또한 1934년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 체결 당시, 폴란드 영토 병합을 주장하며 히틀러의 외교 정책에 반대하기도 했다. 그는 한스 프랑크의 독일법 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했다.
나치 정권과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고, 특히 1936년 라이프치히의 펠릭스 멘델스존 기념비가 유대인 작곡가라는 이유로 나치에 의해 철거되자 이를 재건하려 시도하는 등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1937년, 나치의 압력으로 라이프치히 시장직에서 강제로 물러나게 되었다.
2. 2. 나치 정권과의 관계
괴르델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의회민주주의를 비판하며 1914년 이전 독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보수적인 인물이었고, 극우 성향의 독일국가인민당(DNVP)에서 활동하기도 했다.[3] 그는 1931년부터 1932년, 그리고 1934년부터 1935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나치 정권 하에서 연방 가격통제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이는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 시절 물가 담당 제국 위원으로 임명되어 디플레이션 정책을 감독했던 경험(1931년 12월)과[2], 이후 독일 재무장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에 대처하기 위해 히틀러 정권이 다시 그를 임명(1934년 11월)한 것이다.[2] 초기에는 그의 임명이 대중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2] 실질적인 권한은 거의 없었다.[2]가격통제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괴르델러는 나치당의 경제 정책, 특히 과도한 군비 지출과 자급자족 정책에 점점 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2] 그는 경제 장관이자 제국 은행 총재였던 히알마르 샤흐트와 인플레이션 정책을 두고 자주 충돌했으며,[2] 나치당 내 만연한 부패에도 혐오감을 느꼈다.[2] 1935년 10월, 그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직접 메모를 보내 재무장을 위한 원자재 수입보다 식량 확보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군비 지출 감축과 자유 시장 경제로의 복귀를 제안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무시했다.[2] 1936년 경제 위기 때는 샤흐트와 함께 군비 축소와 보호무역주의 탈피를 주장하는 "자유 시장" 파벌을 이끌었고, 헤르만 괴링을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 및 군비 확장론자들과 대립했다.[2] 그는 괴링에게 보낸 메모(1936년 8월)에서 제국 마르크 평가 절하, 서방과의 경제 협력, 군비 축소, 그리고 유대인 문제 등에 대한 정책 완화를 제안했지만,[2] 괴링은 이를 "전혀 쓸모없다"며 일축했고,[2] 결국 나치 정권은 4개년 계획을 통해 자급자족과 군비 확장의 길을 택했다.[2]
라이프치히 시장(1930-1937)으로서 괴르델러는 나치의 인종 정책에도 반대했다. 그는 1935년 뉘른베르크법을 시행해야 했을 때 깊은 혐오감을 느꼈으며,[2] 1936년, 나치가 라이프치히 출신의 유대인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의 동상을 철거하자, 괴르델러는 이를 재건하려 노력하며 강력히 항의했다.[2] 결국 이러한 나치 정책에 대한 반발 등으로 인해 1937년 시장직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이는 나치 정권과의 결별을 의미했으며, 이후 그는 본격적인 히틀러 반대 저항 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이후에도 괴르델러는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1941년 말, 독일 유대인의 동유럽 추방과 학살 소식에 충격을 받고, 독일 시민권 유지 기준을 제안하는 메모("Das Ziel")를 작성했으며,[4] 1942년에는 라이프치히 유대인 추방에 항의하는 메모를 제출하기도 했다.[4] 그러나 그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입장은 논쟁의 대상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1938년까지는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 일부를 용인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7] 다른 역사가들은 그가 모든 형태의 반유대주의에 반대했으며 이것이 저항 운동의 주요 동기 중 하나였다고 주장한다.[7] 사형수 감방에서 그는 홀로코스트를 나치의 최악의 범죄라고 기록했지만, 동시에 특정 반유대주의적 관점을 유지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2. 3. 반나치 저항 운동
라이프치히의 오버뷔르거마이스터 (시장)직에서 사임한 후, 괴르델러는 당시 독일 최대 기업이었던 크루프 AG의 재정부 부서장직을 제안받았다.[2] 그러나 히틀러는 괴르델러가 이 직책을 맡는 것을 금지했고, 크루프에게 제안을 철회하라고 명령했다. 대신 괴르델러는 로베르트 보쉬 유한회사의 해외 판매부 이사가 되었다.사임 직후, 괴르델러는 반나치 음모에 연루되었다.[2] 그의 친구인 로베르트 보쉬는 그의 반나치 활동을 묵인하기로 동의했다. 보수주의자이자 스스로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자처한 괴르델러는 나치의 극단적인 급진주의에 반대했고, 히틀러의 외교 정책의 결과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2] 1936년부터 괴르델러는 주로 공무원과 사업가로 구성된 자신의 인맥을 통해 반대 세력을 구축하려 노력했다.
반나치 음모에도 불구하고, 괴르델러는 히틀러와 다른 나치 지도자들에게 계속해서 의견서를 제출하며 어떻게든 그들이 노선을 변경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역사가 한스 몸젠은 괴르델러의 사례를 통해 "저항은 과정"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했다. 괴르델러는 정권의 동맹에서 1930년대 중반 나치 경제 정책에 대한 점차적인 환멸을 거쳐, 1937년까지 정권 전복에 헌신하게 되었다.
1938년 초, 괴르델러는 나치 정권에 대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 시기의 괴르델러를 묘사하면서, 미국 저널리스트 윌리엄 L. 시러는 괴르델러를 "마음속으로는 보수주의자이자 군주주의자, 독실한 개신교 신자, 유능하고, 정력적이며, 지적이지만, 부주의하고 고집이 센" 인물로, "히틀러에 반대하는 데 온 마음과 영혼을 쏟았다"고 적었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보쉬의 해외 판매부 책임자라는 직함을 이용하여, 괴르델러는 종종 해외로 여행을 다녔으며, 주로 프랑스, 영국, 미국, 발칸 반도, 중동, 캐나다에 방문하여, 그가 나치 독일의 공격적이고 위험한 외교 정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들어줄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괴르델러는 무모하다고 생각하는 외교 정책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그의 외국인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주데텐란트, 폴란드 회랑, 메멜란트 (현대 클라이페다, 리투아니아), 단치히 자유시의 할양과 독일 식민지의 아프리카 반환을 대국들에게 요구했다. 동시에 괴르델러는 루트비히 베크 장군의 사설 정보 네트워크의 일원이 되었다.
괴르델러의 보고서는 베크뿐만 아니라 베르너 폰 프리치 장군에게도 전달되었다. 독일 역사가 클라우스-위르겐 뮐러는 괴르델러가 해외에서의 접촉에서 실제보다 더 조직적인 운동을 이끄는 것처럼 자신을 잘못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는 자신의 외국 접촉자들에게 잘 조직된 "독일 반대 세력"의 비밀 대변인으로 자신을 소개했다고 언급했다.
괴르델러는 외국 정부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 외에도, 군 지도부에 대한 보고서를 사용하여 육군이 반나치 ''쿠데타''를 고려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1937년 6월, 런던 방문 중 괴르델러는 로버트 반시타트 경에게 나치 정권을 영국의 우호를 추구할 우익 군사 독재 정권으로 대체하고 싶다고 말했으며, 그 대가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일부를 합병하는 데 대한 영국의 지지를 원했다. 1937년 10월, 미국 방문 중 괴르델러는 버지니아에 있는 존 휠러-베넷의 저택에서 머물며 그에게 독일의 군주제를 복원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같은 여행 중, 괴르델러는 나치 경제 정책을 비판하고 반기독교 정책, 만연한 부패 및 무법 상태에 대해 비판하는 "정치적 유언"을 작성했다. 괴르델러는 윈스턴 처칠과 반시타트와 여러 차례 만났다.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과 베르너 폰 프리치 장군의 군사재판으로 인해 발생한 관련 위기 동안, 괴르델러는 다양한 이유로 제3제국의 여러 측면에 불만을 품은 공무원과 군대의 독일 우익 단체들과 긴밀하게 연관되었다. 괴르델러는 프리치 사건을 이용하여 육군 지도부를 나치 정권에 반대하도록 하려 했지만, 그의 노력은 헛수고였다.
1938년 4월, 괴르델러는 런던을 방문하여 영국 정부에 나치의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 지역에 대한 주장을 저항하고, 그 지역을 가능한 한 빨리 독일에 이전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도록 권고했다. 게르하르트 바인베르크가 관찰했듯이, 괴르델러의 모순된 발언들은 영국을 다소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1938년 봄, 괴르델러는 한스 폰 도나니, 한스 오스터 대령, 요하네스 포피츠와 협력하여, 나치 정권이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위한 암호명인 ''녹색 작전''을 시작할 경우 나치 정권에 대한 ''쿠데타''를 계획하는 데 참여했다. 1938년 6월, 베크는 ''녹색 작전''을 막기 위해 참모총장직을 사임해야 하는지에 대해 괴르델러와 자주 상의했다.
밴시타트는 괴르델러를 그의 스파이 중 한 명인 영국 실업가 A.P. 영에게 소개했는데, 영은 여러 독일 기업의 가까운 사업 파트너였고 자주 독일을 방문했다.[4] 영이 보쉬와 자주 사업을 했고 괴르델러가 그곳에서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의심을 받지 않고 자주 만날 수 있었다. 1938년 8월, 괴르델러는 런던에 정보를 유출하기 시작했고, 히틀러가 1938년 9월에 ''녹색 작전''을 시작할 의향이 있음을 영국에 알렸다. 1938년 8월, 괴르델러는 동프로이센의 라우셴 듄 마을에서 영과 만났다.[4] 영과의 만남에서 괴르델러는 런던이 유대인 박해를 중단하도록 독일에게 외교적, 경제적 압력을 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영국 정부에 전달해 줄 것을 영에게 요청했다.[4] 괴르델러는 영국 측과의 더 빈번한 만남을 갖기 위해 1938년 8월부터 10월까지 스위스에 머물렀다.
괴르델러를 만난 영국 정치인과 공무원들은 그의 정직함과 진지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1938년 체임벌린 정부는 괴르델러의 쿠데타 계획에 모든 것을 걸기에는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성공이 불확실했고, 실패한 쿠데타에 대한 영국의 지원이 발각될 경우 체임벌린 정부가 1938년에 피하려 했던 전쟁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영국 공무원은 1938년 8월 22일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 우리는 괴르델러 박사와 같은 ''육군''의 다른 사절들로부터 유사한 방문을 받았지만, 이 사절들이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권을 전복할 수 있는 행동을 할 의지가 있다는 어떤 이유도 우리에게 제시한 적이 없다. 1934년 6월의 장검의 밤 사건과 1938년 2월의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은 육군이 정권에 대항하여 적극적인 행동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지 않는다.
울리히 폰 하셀은 자신의 일기에 괴르델러가 "신중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불평하기보다는 행동하기를 원한다"고 썼는데, 이는 체코슬로바키아가 공격을 받으면 나치 정권에 대항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암시한 장군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1938년 9월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중앙 유럽의 위기가 언제라도 전쟁으로 폭발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자, 괴르델러는 나치 정권을 전복하고 자신이 새로운 총리로서 독일 국가의 지휘권을 잡을 ''쿠데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쿠데타 계획을 세우는 동안 괴르델러는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장군을 중개인으로 사용하여 중국 정보부와 연락을 취했다. 대부분의 독일 보수주의자들처럼, 괴르델러는 독일의 중국과의 전통적인 비공식 동맹을 선호했고, 1938년 초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일본과의 제휴를 위해 중국과의 동맹을 포기한 독일의 극동 정책의 ''전환''에 강력히 반대했다. 1938년 9월 영과의 만남에서 영은 "X"(괴르델러가 영국에서 사용한 암호명)가 독일 국내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음을 보고했다. "노동자 계급은 불안해하고 지도자를 불신한다. 그들의 충성은 의심스럽다." 1938년 9월 11일 취리히에서 열린 또 다른 만남에서 영은 괴르델러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기록했다.
> 전쟁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은 놀라운 속도로 고조되고 있다. 그의 [괴르델러] 최근 주요 기업가들과의 대화는 노동자들의 감정이 무기만 있다면 정권에 물리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격렬하게 자극되었다는 사실을 그를 만족시켰다.
1938년 9월 29일, 괴르델러는 밴시타트의 연락책 중 한 명인 그레이엄 크리스티 대령을 통해 영국 해군의 동원이 독일 여론을 정권에 반대하는 쪽으로 돌리고 있다고 영국에 알렸다. 괴르델러를 잘 알고 있던 영국의 역사가 존 휠러-베넷은 괴르델러가 히틀러가 ''녹색 작전''으로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며 1938년 10월 1일에 체코슬로바키아를 공격할 의사가 분명했고, 뮌헨 협정을 개인적인 좌절로 여겼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1938년, 괴르델러는 뮌헨 협정에 깊이 실망했는데, 그의 견해로는, 비록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넘겨주었지만, 괴르델러가 나치 정권에 대한 ''쿠데타''를 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고 여겼던 것을 제거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았다. 뮌헨 협정 이후, 괴르델러는 그의 미국인 친구 중 한 명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 ...독일 국민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육군은 이를 피하기 위해 무엇이든 했을 것입니다;...세계는 적시에 경고를 받고 정보를 받았습니다. 만약 경고에 귀 기울여 행동했다면, 독일은 이제 독재자로부터 벗어나 무솔리니에게 등을 돌렸을 것입니다. 몇 주 안에 우리는 정의, 이성 및 품위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세계 평화를 건설하기 시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품위 있는 정부를 가진 정화된 독일은 영국 및 프랑스와 함께 스페인 문제를 지체 없이 해결하고, 무솔리니를 제거하며, 미국과 함께 극동에 평화를 구축할 준비가 되었을 것입니다. 건전한 경제적, 사회적 분야에서의 협력, 자본, 노동 및 국가 간의 평화로운 관계 구축, 윤리적 개념의 제고 및 일반적인 생활 수준을 높이려는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을 것입니다.
같은 편지에서 괴르델러는 "국민과 육군이 잔혹하고, 미친 듯하며, 테러적인 독재자와 그의 하수인들에 대해 느끼는 절망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썼다. 휠러-베넷은 괴르델러가 독일 육군과 독일 대중 사이에서 반나치 감정의 정도를 과장하고 있다고 논평했다. 뮌헨 이후, 괴르델러는 영에게 이렇게 말했다.
> 뮌헨에서의 예상치 못한 승리 이후 히틀러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깊이, 분명히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그는 [히틀러] 이제 영국이 타락하고, 약하고, 소심하며, 그의 어떤 계획에도 저항할 배짱이 절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한다. 영국이나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은 절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1938년 11월, 독일 주재 영국 대사인 네빌 헨더슨 경이 병가를 갔을 때, 베를린 주재 대사관의 대행 책임자들은 독일 정책에 대한 영국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외무장관 핼리팩스 경에게 일련의 보고서를 보냈다. 괴르델러는 대사관의 주요 정보원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1938년 11월, 괴르델러는 스위스에서 영을 만나 독일이 독일에서 추방하고 폴란드가 수용을 거부한 폴란드계 유대인 1만 명을 위해 영국 정부가 중재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4] 괴르델러는 독일-폴란드 국경에 갇힌 폴란드계 유대인에 대한 처우가 "야만적"이라고 선언했다.[4] 1938년 12월-1939년 1월, 괴르델러는 스위스에서 영과 일련의 회담을 가졌는데, 그는 영에게 1938년 11월의 ''수정의 밤'' 유대인 박해가 히틀러가 직접 명령한 것이며, 나치가 주장한 것처럼 "자발적인" 시위가 아니라고 알렸다.[4]
괴르델러는 영에게 "유대인에 대한 새로운 박해가 시작되는 즉시 외교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라고 런던에 알리라고 권고했다. 괴르델러는 또한 히틀러가 세계 정복을 추구하고 있으며, ''총통''이 "유대인-기독교-자본주의를 파괴하기로 결정했다"고 믿는다고 영에게 알렸다.[4] 괴르델러는 영에게 독일의 경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경제 및 재정 상황이 매우 위태롭습니다. 내부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있습니다.
영과의 또 다른 회담에서 괴르델러는 "노동자 계급은 불안해하고 지도자를 불신합니다. 그들의 충성은 의심스럽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괴르델러는 영에게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전쟁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은 놀라운 속도로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그[괴르델러]는 최근 주요 산업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노동자들의 감정이 맹렬하게 격앙되어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면 현재 정권에 물리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정도라는 것을 X에게 확신시켰습니다.
괴르델러가 영에게 보낸 보고서는 1974년 영에 의해 ''"X" 문서''로 출판되었다.
1938년 12월, 괴르델러는 다시 영국을 방문했는데, 그는 극단적인 독일 민족주의적 언어와 단치히, 폴란드 회랑과 아프리카의 구 독일 식민지 반환에 대한 영국의 지원 요구, 그리고 나치 이후의 독일에게 거액의 대출을 요구하여 만난 영국 공무원들을 소외시켰다. 괴르델러는 외무부의 프랭크 애슈턴-그와트킨에게 영국이 나치 이후 정부에게 무이자 대출 5억 파운드를 제공하여 괴르델러가 보호주의를 종식하고, 발칸 반도를 독일의 영향권에 두려는 노력을 중단하고, 지중해에서 이탈리아에 대항하여, 그리고 극동에서 일본에 대항하여 영국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독일 내 반나치 감정의 정도에 대한 괴르델러의 과장과 쿠데타를 조직할 수 없는 그의 무능함이 영국에 점점 더 분명해졌다. 알렉산더 카도건은 괴르델러의 제안에 대해 "우리는 상품을 인도하고 독일은 차용증을 준다"고 썼다. 체임벌린은 더욱 적대적이었고 "이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해야 한다"고 썼다.
같은 달에 괴르델러는 군축, 국가 간 관계를 위한 "도덕 강령" 및 다양한 통화의 안정을 고려하기 위해 세계 주요 강대국 전체의 국제 회의를 소집하는 "세계 평화 프로그램"을 작성했다. 괴르델러의 "세계 평화 프로그램"의 마지막 부분은 "협력하지 않는 사람은 전쟁을 원하며 평화를 깨는 자이다"라고 적혀 있다.
뮌헨 협정 이후 괴르델러는 큰 좌절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정권의 몰락을 가져오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굳건한 낙관주의자였던 괴르델러는 충분한 사람들을 설득할 수만 있다면 나치 정권을 전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괴르델러는 자신의 의지와 대의의 선함만으로 나치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었다. 괴르델러는 1938~39년 겨울 대부분을 루트비히 베크 장군, 외교관 울리히 폰 하셀, 에르빈 플랑크 등과 함께 나치 정권을 전복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한 논의를 나누는 데 보냈다. 동시에 히틀러는 괴르델러의 신중한 행동을 촉구하는 메모에 점점 더 짜증을 냈다. 괴르델러는 슈하트 박사, 베크 장군, 하셀, 경제학자 루돌프 브링크만과 함께 히틀러에 의해 "과잉 지적인 지식인 집단"으로 묘사되었으며, 그들은 신중함을 요구하는 호소로 그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을 막으려 했고, 그들의 기술이 필요했기에 "그렇지 않았다면, 언젠가 그들을 몰살하거나 그들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38~39년 겨울 동안 괴르델러는 영국에 보고서를 보내 히틀러가 이탈리아에 프랑스를 공격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으며, 1939년 2월 후반에 영국 도시를 초토화하여 "녹아웃 펀치"를 가하기 위한 영국에 대한 기습 공중 공격을 계획하고 있으며, 프랑스와 영국을 공격하기 전에 스위스와 저지대 국가를 침공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괴르델러는 자신이 아프베어 국장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과 한스 오스터 장군이 제공한 허위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이 보고서가 영국의 외교 정책 변화를 가져오기를 희망했다. 카나리스와 오스터는 괴르델러의 허위 정보로 인해 먼저 1939년 1월 말 영국 정부를 사로잡았던 "네덜란드 전쟁 공포"를 초래했고, 2월에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이 프랑스, 스위스, 저지대 국가에 대한 독일의 공격은 자동적으로 영-독 전쟁의 ''casus belli''로 간주되어 영국은 대규모 지상군으로 프랑스를 방어하기 위한 "대륙 약속"을 하게 될 것이라는 공개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39년 3월 16일, 괴르델러는 영(Young)에게 영국이 국제 질서의 변화에 대한 "정당한" 독일의 요구를 논의하기 위해 국제 회의를 소집할 것을 제안했다. 괴르델러는 히틀러가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하여 그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은 괴르델러의 회의 아이디어를 코델 헐에게 전달했고, 헐은 깊은 인상을 받아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주재하는 제안된 회의를 개최하겠다고 제안했다. 이것이 루스벨트가 1939년 4월 15일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앞으로 10년 동안 평화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할 것을 호소한 기원이 되었다. 그 대가로 루스벨트는 새로운 경제 국제 질서를 약속했다.
1939년 3월 후반, 괴르델러는 슈하트, 한스 베른트 기제비우스와 함께 스위스 우시를 방문하여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를 대표하는 프랑스 ''Deuxième Bureau'' 정보 요원과 만났다. 괴르델러는 요원에게 막대한 군사 지출의 압박으로 독일 경제가 붕괴 직전에 이르렀고, 히틀러는 단치히 문제를 구실로 폴란드를 침공하기로 결심했으며, 이는 독일이 동유럽 전체를 점령하기 위한 서곡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또한 강력한 영-불 외교적 입장이 히틀러를 억제할 수 있으며, 히틀러가 충분히 억제된다면 독일의 경제 붕괴가 그의 정권 몰락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1939년 4월, 영국 외교관 글래드윈 젭과의 비밀 회의에서 괴르델러는 영국이 1939년 3월에 채택한 "봉쇄" 정책을 계속한다면 "히틀러 모험...은 1939년 6월 말 전에 청산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정보의 정확성에 대한 상당한 논쟁이 있으며, 리처드 오버리와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괴르델러와 다른 독일 보수주의자들이 독일의 경제
2. 4. 체포 및 처형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이전부터 게슈타포의 추적을 받던 괴르델러는 잠적했다. 그러나 1944년 8월 12일, 폴란드 마리엔베르더(현재의 크비드진)에서 부모의 묘소를 방문하던 중, 헬레네 슈베르첼(Helene Schwärzel)이라는 부기 담당자의 밀고로 체포되었다.[2] 괴르델러가 체포된 후, 그의 가족 8명은 나치의 연좌제 법률인 ''지펜하프트''(Sippenhaft)에 따라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의 동생인 프리츠 괴르델러 역시 반나치 활동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45년 3월 1일에 처형되었다.[11]
게슈타포 심문 과정에서 괴르델러는 홀로코스트가 나치 정권을 전복시키려 한 주요 동기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체적인 고문을 받지는 않았으나, 게슈타포에 협조하여 다른 공모자들의 이름을 털어놓았다는 이유로 다른 수감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괴르델러와 같은 감옥에 수감되었던 친구이자 역사학자인 게르하르트 리터는 괴르델러가 직접적인 고문은 당하지 않았지만, 감방의 과도한 난방, 고통스러운 자세 강요, 수면 방해, 식량 부족 등으로 고통받았다고 증언했다. 괴르델러는 게슈타포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시간을 벌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 과정에서 음모에 연루된 수백 명이 체포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감옥에 있는 동안 SS로부터 미래 독일의 헌법 초안 작성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오토 올렌도르프 등과 만나기도 했는데, 이것이 진심이었는지 시간을 벌기 위한 행동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1944년 9월 9일, 괴르델러는 롤란트 프라이슬러가 재판장으로 있는 인민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던 그는 감옥에서 영적인 문제에 더욱 몰두했으며, 리터는 1945년 1월 그를 만났을 때 그의 외모가 초췌해지고 눈빛이 변했으며, 영혼이 극도로 피폐해 보였다고 기록했다. 감옥에서 쓴 편지에서 그는 홀로코스트를 나치의 가장 끔찍한 범죄로 규탄했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 생활에 침투했던 유대인들의 큰 죄"를 언급하며 반유대주의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괴르델러는 1945년 2월 2일 베를린의 플뢰첸제 감옥에서 요하네스 포피츠, 알프레트 델프와 함께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12] 그는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쓴 고별 편지에서 "나는 세상이 우리의 순교를 독일 국민을 위한 속죄로 받아들이기를 요청한다"고 적었다.
전쟁 후, 괴르델러를 밀고했던 헬레네 슈베르첼은 1946년 반인륜적 범죄 혐의로 15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6년으로 감형되었다.[13]
3. 7월 20일 음모 이후 구상
괴르델러는 히틀러 정권 전복 이후 독일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7월 20일 음모가 성공했을 경우, 새 정부의 총리로 내정되어 있었다.[2]
괴르델러는 동료 공모자들과 함께 나치 독일 이후의 정치 체제에 대해 논의했으며, 영국식 입헌 군주제를 선호했다. 그는 황제가 "통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헌법을 감시하고 국가를 대표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2] 1940년에서 1941년 겨울 동안 괴르델러는 포피츠, 베크, 하셀과 함께 차기 독일 군주에 대해 논의하며 호엔촐레른 가문의 오스카르 폰 프로이센 왕자를 지지했다. 그는 빌헬름 2세나 그의 아들 빌헬름 황태자는 여러 이유로 부적합하다고 판단했다.[2]
그는 또한 미래의 독일 헌법 초안을 구상했다. 이 헌법은 강력한 행정부, 높은 수준의 지방 분권, 그리고 부분적으로 국민 직접 선거와 부분적으로 지방 의회 대표 선출로 구성되는 의회(Reichstag), 그리고 기독교 교회, 노동 조합, 대학교, 기업 그룹 대표로 구성된 상원(Reichsrat)을 포함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2] 이러한 헌법 구상에는 디트리히 본회퍼를 통해 알게 된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반나치 교수 그룹인 소위 '프라이부르크 서클'(아돌프 람페, 에리크 볼프, 발터 오이켄, 콘스탄틴 폰 디체, 게르하르트 리터 등)의 도움을 받았다.[2]
1944년 6월, 괴르델러는 쿠데타 성공 시 권력을 잡을 내각 명단을 최종적으로 완성했다. 또한, 쿠데타 성공 후 발표할 라디오 연설문도 준비했는데, 여기에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가장 비인간적이고 깊이 수치스러우며 회복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규정하고 이를 중단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2]
3. 1. 괴르델러 내각 (구상)
1944년 6월, 괴르델러는 최종 내각 명단을 완성했다. 1944년 7월 20일 음모가 성공했다면 권력을 잡았을 내각은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직책 | 이름 | 소속/비고 |
---|---|---|
국가 대통령 (섭정 - Reichsverweser) | 대장 루트비히 베크 | |
섭정 국무 장관 | 울리히 빌헬름 그라프 슈베린 폰 슈바넨펠트 | |
총리 | 카를 프리드리히 괴르델러 | DNVP |
총리 국무 장관 | 백작 페터 요르크 폰 바르텐부르크 | |
부총리 | 빌헬름 로이슈너 | SPD |
부총리 | 야콥 카이저 | 기독교 노동조합 지도자 |
국방부 장관 |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장군 | |
국방부 장관 국무 장관 | 대령 백작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 |
국군 총사령관 | 에르빈 폰 비츠레벤 원수 | |
육군 총사령관 | 에리히 회프너 대장 | |
내무부 장관 | 율리우스 레버 | SPD |
경제부 장관 | 파울 레주네-융 박사 | 변호사 및 경제학자 |
재무부 장관 | 에발트 뢰저 | DNVP |
법무부 장관 | 요제프 비르머 | 중앙당 |
교육부 장관 | 오이겐 볼츠 | 중앙당 |
농업부 장관 | 안드레아스 헤르메스 | 중앙당 |
재건부 장관 | 베른하르트 레터하우스 | 기독교 노동조합 지도자 |
정보부 장관 | 테오도어 하우바흐 | SPD |
외무부 장관 자리는 울리히 폰 하셀 (전 이탈리아 주재 대사) 또는 백작 프리드리히 베르너 폰 데어 슐렌부르크 (전 소련 주재 대사) 중 서방 연합국 또는 소련 중 어느 쪽이 새로운 독일 정부와 먼저 휴전 조약을 체결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예정이었다. 괴르델러가 쿠데타 성공 후 발표할 라디오 연설문에는 "가장 비인간적이고 깊이 수치스러우며 회복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행된 유대인 박해는 중단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4. 유산 및 평가
괴르델러는 나치 정권에 맞서 싸운 보수주의 저항 운동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히틀러 정권 타도 후 총리로 예정되었으나, 7월 20일 음모 실패 후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2] 1944년 9월 9일 인민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수개월간의 가혹한 심문 과정에서 많은 공모자들의 이름을 발설하여 수백 명의 체포와 처형을 초래하기도 했다. 결국 1945년 2월 2일 처형당했다.
그의 용기와 희생은 오늘날에도 기억되고 있지만, 그의 정치적 입장과 특히 반유대주의에 대한 태도는 논란의 대상이다. 그는 나치의 인종 정책에 반대했고, 라이프치히 시장 시절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철거된 펠릭스 멘델스존 기념비 재건을 시도하다 결국 시장직을 사임하는 등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1938년에는 독일에서 추방된 폴란드계 유대인 문제 해결을 위해 영국 정부의 중재를 요청하고, 수정의 밤을 히틀러가 직접 명령한 만행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4]
그러나 동시에 그는 보수적인 정치 성향(군주제 지지, 반공산주의)을 가졌으며, 일부 반유대주의적인 시각을 유지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941년 작성한 "Das Ziel"("목표")이라는 메모에서는 유럽 유대인을 남미나 캐나다에 세울 유대 국가로 추방할 것을 제안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나 1871년 이전 독일 제국 시민의 후손 등 특정 범주의 유대인에게만 독일 시민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 사형수 감방에서 쓴 편지에서도 홀로코스트를 나치의 가장 끔찍한 범죄라고 규탄하면서도, 여전히 반유대주의적 입장을 드러냈다.
이러한 그의 행적과 기록을 둘러싸고 역사가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크리스토프 디퍼(Christof Dipper)와 마르틴 브로자트(Martin Broszat) 등은 괴르델러가 1938년까지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 일부를 용인했으며, 홀로코스트에는 반대했지만 전후 유대인의 완전한 시민권 회복에는 소극적이었다고 주장한다.[7] 톰 세게브(Tom Segev)와 데이비드 뱅키어(David Bankier) 역시 괴르델러가 유대인을 독일 사회의 이질적인 요소로 간주했으며, 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지지한 것은 반유대주의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8][9] 뱅키어는 괴르델러가 홀로코스트에는 경악했지만, 유대인 문제의 해결책으로 유대 국가 설립과 소수 엘리트 유대인에게만 시민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생각했다고 지적했다.[9]
반면, 피터 호프만(Peter Hoffmann)과 대니 오르바흐(Danny Orbach)는 괴르델러가 반유대주의에 일관되게 반대했으며, 이러한 신념이 나치 정권 타도 노력의 중요한 동기였다고 주장한다.[4] 호프만은 1941년 메모가 집단 학살의 대안을 제시하려는 시도였으며, 실제로는 독일 유대인 대다수의 시민권을 유지하려는 의도였다고 해석한다.[4] 오르바흐는 괴르델러가 시온주의를 지지하고 하임 바이츠만과 협력하여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도왔다는 점을 들어 반유대주의 혐의를 반박한다.[8]
이처럼 괴르델러는 나치즘에 저항한 인물로 평가받는 동시에, 그의 보수적 한계와 반유대주의에 대한 복합적인 태도로 인해 여전히 논쟁적인 인물로 남아 있다.
5. 매체에서의 묘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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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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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istory.sfsu[...]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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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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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knap Press: Cambridge, 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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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don: George Allen & Un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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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ädoyer für Historisierung des Nationalsozialismus
https://www.merkur-z[...]
198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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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are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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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ews in Plans for Postwar Germany
http://jcpa.org/arti[...]
Jerusalem Center for Public Affairs
2012-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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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elene Schwärzel
http://www.lexikon-d[...]
2022-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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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Gedenkstätte Deutscher Widerstand
http://www.gdw-ber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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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Advent of the Heart: Seasonal Sermons and Writings - 1941-1944
https://books.google[...]
Ignatius Press
2017-10-29
[13]
뉴스
"Das Böse war stärker"
https://www.spiegel.[...]
202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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